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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개발자
밤이 지나면 아침이 찾아온다. 응당 그렇다고들 한다. 밤은 가끔, 그렇게 통과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정의되곤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생의 절반은 밤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 길고 긴 시간들이 그저 통과되어야 하는 것으로만 인식한다니. 아깝기 그지없는 시각이지 않은가. 영화는 그 통과 과정으로써의 '밤'을 잔잔하게 고찰한다. 새벽의 모든, 이라는 제목에서 그 야심이 느껴진달까. 새벽에 닿기 위해서는 밤을 통과해야 한다. 모든 새벽은 그렇게 결국 밤을 통과하였고, 이어서 아침을 향해 달려간다. 새벽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겠다니, 그 포부가 상당하다고밖에. 밤은 해체의 시간이다. 하루동안 단단하게 유지해야 했던 것들은 여지없이 스르르 풀어진다. 약점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가감 없이 내보인다...
골조가 없는 채로 건물을 세울 수 있을까? 관계, 그리고 상황들 역시 그럴 것이다. 우리는 골조라고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맥락들을 읽어낸다. 이 상황이라면 의당 그럴 것이라고 믿는 구석들은 관계와 상황의 기초가 되어서 착실하게 형태를 구성해 나간다. 예컨대 소설에서는 클리셰라는 것이 바로 그 골조에 해당할 것이다. 상황과 상황 사이를 적절하게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그 클리셰가 없다면 소설은 종횡무진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맥락으로 우리를 혼란시키기만 할 것이다. 즉, 적절한 클리셰(골조)는 소설(건물)의 형태를 굳건하게 세워준다. 영화는 크게 두 가지 사건으로 나뉘어져 있다. 첫 번째 사건은 어느 등산가가 정상에서 세 번 머리를 박으며 떨어져 사망한 사건이다. 사건의 맥락은 일목요연하다...
기본적으로 나는 추억하기를 참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계속해서 반복해서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고 보면 추억하기에 딱 좋은 계절이 바로 여름이다. 잠깐 떠올렸을 뿐인데도 시원한 바다와 청명한 하늘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 습하고 짠 공기, 흔하디 흔한 흘러간 여름 노래들이 코와 귀 앞을 맴돌고, 바스락거리는 모래와 축축한 자갈의 맨들맨들한 질감 같은 것들이 왠지 손 끝에 남아있는 듯하다.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계곡물에 담가둔 수박, 텐트, 졸졸거리는 시냇물 소리, 밀짚모자를 쓴 할아버지, 자글거리는 삼겹살 굽는 소리 같은 게 연쇄적으로 떠오른다. 반면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사계절 중 손에 꼽을 정도로 힘겨운 계절이 여름이기도 하다. 윙윙..
아직 분가를 하지 않았을 시절. 분명히 내가 어딘가에 잘 보관했다고 생각한 물건이 사라져 있는 상황이 왕왕 있었다. 누가 어디로 옮겼을까. 썼으면 원래 자리에 잘 놔둬야 하는 거 아니야? 동생인가? 아니면 방을 정리하던 중 엄마가? 당혹스러움이 분노로 변하는 과정은 점진적이면서 격정적이다. 그리고 한참 분개하며 방을 이리저리 들쑤시다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물건이 등장하는 상황. 그곳에 그 물건이 있는 이유가 파노라마처럼 촤르륵 스쳐 지나가고 그 범인이 나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내 속을 가득 불태우던 그 감정은 물에 녹는 솜사탕처럼 사르르르 녹아버리는 바로 그런 상황. 상황 자체는 변한 것이 없지만 마음속은 마치 한 편의 영화나 마찬가지이다. 즉, 상황은 맥락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마치 '가족'..
요즘 세상에서 물건을 사는 것은 정말 간단한 일이다. 핸드폰에 몇 번의 터치만으로도 결제가 되는 데다가 우리 집 앞까지 배달까지. 국내에서 사는 건 거의 하루 만에 배달이 완료되고, 해외 배송이라도 일주일이면 거뜬하다. 저 먼 곳 어느 창고에 쥐 죽은 듯 쌓여있었을 물건이 순식간에 그 운명을 탈바꿈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걸리는 과정 치고는 너무 숨 막히듯 급박하다. 하지만 이런 빠르고 편리한 시스템 때문에 실수가 발생하기도 하는데, 이번에 내가 겪은 일이 바로 거기에 해당한다. 내 이전 주소로 오배송 시켜버린 것이다. 구매 플랫폼이 워낙 다원화되어 있기 때문에 주소 관리를 소홀히 한 탓이기도 하지만 시스템의 문제이기도 하다. 주소를 미처 채 챙길 틈도 없이 휘몰아치며 구매를 완료하라고 닦달하는, ..
온통 흐릿한 곳에서 명확하게 펼쳐진 길이 있다면 아무런 의심 없이 그 길을 따르게 될까? 예컨대 어두운 밤. 달빛 하나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빛이 단 하나의 길을 비추고 있다면. 그렇다면, 정말 그렇다면 아무런 의심 없이 그 길을 따라 걷게 될까? 빈센트는 태어나면서부터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부적격이란, 유전자 조작을 통한 인공 수정이 일반화되어 있는 세상에서 자연 분만을 통해 태어났다는 의미이다. 한 사람의 특징들을 마치 찰흙 주무르듯이 매만져서 정형화된 특징들만 남기는 작업. 인간의 구조에 자본주의와 공장이 결합하여 주입된 사회에서의 그 거대한 프레임 속에서 마치 로또 랜덤 뽑기를 하듯이 자식을 낳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빈센트의 부모는 그렇게 했다. 프랑스의 리비에라와 같은 이름의 자동..
변화는 과연 어떻게 일어난다고 할 수 있을까? 우선 우리는 매일 매일 변화하고 있다. 머리카락이 자라고, 세포가 죽고 새로 생겨나는 식으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 순간마다 변화한다. 아마 십몇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비교컨대 테세우스의 배 문제에 봉착해 있다. 나는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튼, 우선 범위를 조금 좁혀서 이렇게 생각해보도록 해야겠다. 우리는 자의로 변화하는 걸까? 아니면 타의로? 쉽지 않은 문제임은 분명하다. 우선 자의의 범위부터가 애매하다. 사회에 귀속에서 어떤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이상 그 질서 속의 자의란 어떻게 보면 타의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타의라고 단정짓기에는 왠지 나의 주체성을 무시하는 듯한 뉘앙스 때문에 거부감이 든다. 하지만 영화는 적어도 변화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