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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브 인터레스트(2023) : 오감과 상상 본문

내가 쓴 글/영화 리뷰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3) : 오감과 상상

김디트 2025. 2. 1.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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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하는 걸 참 쉽게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년은 넘게 지난 일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런 시절이 있었다. 상상만큼 쉬운 건 없다고까지 생각했으니까, 참 어렸고 어리석었다. 어린것이 어리석다는 것과 동의어라는 뜻은 아니지만, 나로 한정 지어 생각하면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뭐, 그 시절엔 모든 것이 쉬워 보였으니까. 내 몸이니 당연히 모든 걸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시기기도 하다. 늙음과 노쇠함 같은 건 나와 전혀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없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연결지음이야말로 상상의 영역이었다. 그 정도의 연결도 짓지 못하면서 상상력을 깔보았던 것이다!

 

  영화로 돌아가보자. 영화는 끊임없이 무시되는 부분들을 강조한다. 등장인물들은 전혀 거리낌 없이 무시해 버리는 수많은 정보들. 무시할 정도라면 정말 흔하고 고요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의 정보들일 것 같은 직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극 중 등장인물들이 인지하는 정보들로 사용된다. 되려, 내 입장에서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정보들만 쏙쏙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무시해야 할 정보와 관계해야 할 정보의 자극이 반전되어 있다. 그 반전적 성질 때문에 우리는 의아하고 끔찍한 상황 속의 고요하고 목가적인 생활에 분노와 공포 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실 공포야말로 확고한 상상의 영역이다. 영화는 그 점을 너무나 잘 활용한다. 공포를 불러일으킬만한 요소들은 소리로만 표현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벽 너머의 것을 상상한다. 아우슈비츠에서 들려오는 총탄 소리, 끊임없이 울어대는 어린아이의 소리, 암전 하며 울려 퍼지는 공포 영화에서나 울릴 법한 음산한 BGM, 파티 속 연주 소리와 그에 대한 갈채 소리 등. 화면이 담지 못하는 것들을 우리는 상상한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은 그 상상력이 결여된 것처럼 보이며, 그 차이로 우리는 인지부조화를 느낀다.

 

  하지만 이는 뇌의 메커니즘을 떠올려 보면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오감이 받아들이는 모든 정보를 소화하지 못한다. 뇌는 연산에 드는 자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익숙한 정보들을 소거하고 내게 중요한 정보들을 우선순위를 매긴다고 한다. 즉, 우리는 유의 깊게 보지 않는 한 우리 주변의 것들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흐릿하게 인지할 뿐이라는 것. 그렇기에 우리는 일상을 지겨워하는 것일 테다. 일상이란 마치 눈을 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극이 없는 상태이기에. 그렇기에 우리는 그렇게 여행을 갈구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즉, 등장인물들은 주변 환경과 자신의 일에 완전히 녹아들었고 그 정보들을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있다. 마치 우리가, 닭고기의 생산 과정을 상상하지 않고 닭을 소비할 수 있는 것처럼. 커피콩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상상하지 않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것처럼. 루돌프는 누구나처럼 자신의 관심사로 세상을 치환시켜 정보를 단순화시킨다. 파티를 바라보면서도 어떻게 가스로 몰살시킬 수 있을까 골몰한다.

 

  실제로 영화에서, 루돌프의 장모가 방문했을 때의 반응이야말로 우리의 반응일 것이다.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사상 속에 진하게 녹아있는 그였음에도(유대인의 몰수된 재산, 커튼에 대한 경매를 했던 것을 사소한 해프닝처럼 읊을 수 있을 정도이다.) 수많은 끔찍한 소음들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고, 아침조차 거른 채, 아마도 그 끔찍함을 열거했을 후기만을 남긴 채(알고 싶지 않던, 소거된 정보를 굳이 상기시키는 그 후기는 재빠르게 화로 속으로 던져진다.) 서둘러 떠나버리고 만다.

 

  영화는, 제목에서와 같이 '공간'을 중요하게 내세운다. 사실, 공간이란 그저 개념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편리하고도 충실하게 용도와 분위기와 사용자를 구분해 준다. 구분감이야말로 공간의 존재의의일 것이다. 루돌프는 사용하지 않는 공간을 정리하고, 정리되지 않은 공간에 남아있는 자신의 딸을 정리한다. 용도에 따른 정리. 하지만 그 구분감은 '소리'로 여지없이 무너진다. 벽을 뚫고 들어오는 수많은 소음들은 공간이 만들어내는 소용들을 가르고 우리를 상상 속으로 몰아넣는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공간 속에서 그걸 무시할 수 없는 우리는 끔찍함만을 상상한다. 부부의 인지 속에서는 천국과도 같은 그 공간이, 상상력을 곁들일 수 있는 우리가 보기에는 지옥도의 한중간에 꾸며진 인위적인 낙원처럼 보일 뿐이다.

 

  그리고 그 공간의 소용을 완수하기 위해 준비되어야 할 수많은 작업들에 드는 품 역시 자연스럽게 소거되어 있다. 가정부들과 개처럼 뚜렷하게 보이는 요소들이 마치 삭제된 것처럼 다뤄지는 것을 보다 보면 그로테스크함을 느끼게 된다. 영화 상에서는 이탈리아에서 소에게 아코디언을 연주했던(노예를 사람으로 대우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이야기가 유머로 소비되는데, 그와 아마도 동등할 그 집안의 개와 말의 존재보다도 가정부의 존재가 더 가혹하게 삭제되는 것을 끊임없이 화면에 노출시킨다. 화면은 등장인물들이 무시한 요소들을 집요하게 쫓아가 담아낸다.

 

  영화는 루돌프가 다른 곳으로 전근을 갔다가 돌아오기 전, 집으로 전화를 하고, 헛구역질을 하며 어두운 계단, 복도 속으로 사라지는 것과 현대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전시관을 노동자들이 청소하는 모습을 교차하여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주의를 기울이기 전까지는 무시해도 되는 정보는 몸속 상태 역시 포함일 것이고, 그의 헛구역질은 지금까지 무시하던 정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될 그의 미래를 상상하게 만든다. 또한, 현대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전시관을 담담하게 청소하는 모습은 좀 더 적나라하게 루돌프와 우리의 공통점을 드러낸다. 아우슈비츠의 역사를 나타내는 지표가 아닌, 그저 노동이 향하는 목표로 다루고 있는 노동자들은, 우리가 노동을 하면서 소비하고 그와 함께 무시하는 수많은 정보들을 다시금 돌이켜보게 한다.

 

  즉, 영화는 우리를 상상하게 하는데, 이렇게 나를 지적해 주기 전까지는 도저히 상상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어려운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상상하는 걸 참 쉽게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년은 넘게 지난 일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런 시절이 있었다. 상상만큼 쉬운 건 없다고까지 생각했으니까, 참 어렸고 어리석었다. 어린것이 어리석다는 것과 동의어라는 뜻은 아니지만, 나로 한정 지어 생각하면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뭐, 그 시절엔 모든 것이 쉬워 보였으니까. 내 몸이니 당연히 모든 걸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시기기도 하다. 늙음과 노쇠함 같은 건 나와 전혀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없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연결지음이야말로 상상의 영역이었다. 그 정도의 연결도 짓지 못하면서 상상력을 깔보았던 것이다!

 

  영화로 돌아가보자. 영화는 끊임없이 무시되는 부분들을 강조한다. 등장인물들은 전혀 거리낌 없이 무시해 버리는 수많은 정보들. 무시할 정도라면 정말 흔하고 고요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의 정보들일  같은 직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극 중 등장인물들이 인지할  있는 정보들의 특징이 바로 그것들이다. 되려,  입장에서는 절대 무시할  없는 정보들만 쏙쏙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무시해야 할 정보와 관계해야 할 정보의 자극이 반전되어 있다. 그 반전적 성질 때문에 우리는 의아하고 끔찍한 상황 속의 고요하고 목가적인 생활에 분노와 공포 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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